• 알고 봐야 맛있다 제주도가 그렇다

  •  여심 홍찬선(如心 洪讚善, 시인 소설가 자유기고가)

    제주도는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갈 때마다 바뀐 모습으로 놀라게 한다. 알고 봐야 제대로 느끼고, 느낌으로 다가서야 참맛을 알고, 참맛을 즐겨야 제주도의 많은 모습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제주도에 처음 간 것은 1984년 가을, 대학교 3학년 때 졸업여행이었다.두 번째는 1989년 10월, 신혼여행이었다. 그 뒤 업무 상 회의와 골프를 위해 이십여 차례 갔지만, 떡이 되도록 술 마신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라봉에서의 해돋이와 이중섭미술관에서의 먹먹함과 추사유배지에서의 아픔이 더러 남아 있는 정도였다.



    서귀포항에서 바라본 정방폭포와 눈 덮인 한라산 


    ◆결혼 32년 만에 함께 한 제2의 신혼여행



    세월이 하염없이 흘렀다. 제주도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삶의 시공간이 달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인연이 하나 둘 모이며 우연이필연이 됐다. ‘대한민국 희망일출 팀’이 마라도를 가기로 했다. 기회는 찬스였다.

    1박2일로 마라도만 갔다 오면 너무 아까우니, 이참에 이틀 먼저 가서 32년 전의 제주도를 맛보기로 했다. 제2의 신혼여행이란 타이틀을 달았다. 『아트매거진 홍익미술』이 마치 때를 맞추기나 한 듯 <예술 섬 제주도 미술관 기행>이란 주제로 발간돼, 어디를 가야할 지를 고민하지 않고 찾아가는 가이드북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렌터카를 타고 제2신혼여행의 길에 올랐다. 처음에 들른 곳은 제주도립미술관. 넓게 자리 잡은 미술관 주차장이 거의 비어 있어 휴관인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거의 없는 조각정원을 지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다. 휴관은 아닌데 코비드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관람객이 거의 없었다. 물방울 작품으로 유명한 김창열 작가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물방울 작품을 더 많이 보려고 김창열미술관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시간은 이미 점심 시간이 가까웠지만 가다가 제주흙돼지 식당이 나오면 먹기로 했다. 가다보니<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이정표가 보였다. 고려가 원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우다 항복한 뒤, 김통정 장군이 삼별초를 이끌고 이곳에 와서 원과 끝까지 싸웠던 곳이다. 그 때 쌓았던 내성(內城)을 일부 복원하고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워 그때 그분들의 충절을 달래고 있었다.









    항몽유적지와 발굴현장 



    세월의 덧없음을 진하게 느끼며 차에 올라 1분도 채 가지 않아서 보리밭을 만났다.

    항몽유적지가 내성이라면 이곳은 흙으로 쌓은 외성(外城) 바로 안쪽이었다. 이삭이

    피어 누렇게 익기 시작하는 보리밭. 요즘은 전북 고창이나 제주도 앞 가파도 등 일부지역 외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보리밭. 천안(天安)에서 자란 옆지기는 보리밭을 처음 본다며 연신 사진 찍기에 바빴다.






    제주현대미술관에서 김흥수(金興洙, 1919~2014) 작가의 ‘음양 조형주의’ 작품을 감상했다. ‘하나의 화면에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질적 화면의 공존’을 추구하는 독특한 작품세계였다.



    현대미술관에서 김창열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숲길에서 토끼풀 꽃으로 꽃팔찌를 만들어 옆지기에게 주고, 김창열미술관에 들어갔다. 김창열은 잘 몰라도 ‘물방울 화가’라고 하면 ‘아! 그 작가…’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물방울로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화가다. 그는 50년 동안 물방울을 그렸다. 캔버스에서 신문지로, 모래에서 나무판으로 진화하며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을 표현했다. 2021년 1월에 귀천한 김창열 작가의 1977년작 물방울 작품이 경매에서 10억4000만원에 낙찰됐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나날이 치솟고 있는 그의 작품을 마음 놓고 볼수 있어 행복했다.



    회귀, Recurrence, SH87003, 마포에 염료, 유채, Pigment, Oil on linen, 195x330cm, 1987





    시간은 짧고 갈 곳은 많은 게 아쉬움이었다. 넓고 넓은 제주도를 이틀 동안 돌아봐야하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본태박물관과 방주교회로 돌렸다.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경관과 한국의 미를 콘크리트로 표현했다고 해서 유명한 곳이다. 본태(本態)란 본연의 모습이란 뜻으로 인류의 문화적 소산에 담겨진본래의 아름다움을 탐구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안도 다다오의 노출콘크리트기법과 전통한국 건축이 어울어진 본태미술관 




    본태미술관에서는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방주교회로 향했다.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이 건물은 물 위에 떠 있는 배 모양의 건물이다. 반짝이는 삼각형 메탈로 지붕을 해 물고기의 비늘처럼 표현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방주교회 야경 

    시계바늘이 어느덧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첫날 산방굴사와 추사 김정희 유배지까지는 둘러봐야 하는데, 발걸음이 급해졌다. 안동 김가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된 추사는 산방굴사 앞마을, 대정리에서 9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귀양살이를 했다.



    가시가 빽빽이 달린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만 살도록 하는 고통스런 생활이었다.

    추사는 굴하지 않고 이곳에서 국보 180호인 세한도(歲寒圖)를 그렸고, 추사체를 완성했다. 19세기 초중반 동아시아 최고의 천재였던 추사의 숨결은 그가 살았던 유배지 집과 추사기념관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추사기념과 - 세한도와 너무나 흡사하다.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가 유배되었던 집이 복원되어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맛있는 제주도

    용두암 


    이튿날 새벽, 사라봉에 가서 해돋이를 보려고 눈을 뜨니 흐렸다. 호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라산 정상에 구름이 잔뜩 걸렸다. 어제의 강행군에 이어 오늘도 갈 곳이

    많으니 아침이라도 편하게 지내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하고, 다시 누웠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니 벌써 환해졌다. 서둘러 용두암으로 향했다.



                 용두암 앞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용두암은 볼 때마다 새로웠다. 늘 늦은 밤, 바닷가에서 멍게에 소주 한 잔 마시며 보는 맛에 익숙해 있었는데, 아침 일찍 멀쩡한 머리로 마주하는 맛은 완전히 달랐다. 가슴으로 느끼는 멋과 머리로 생각하는 맛의 차이라고나 할까…. 열 번 쯤은 왔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용연(龍淵)을 찾은 것도 새로웠다. 제주시 중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한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있는 작은 연못, 백록담에서 솟구쳐 펄펄 끓는 용암이 흐르다 굳은 현무암이 바닷물에 깎여 계곡이 되고 주상절리가 시위하는 절경을 두고만 볼 수 없어, 용이 와서 놀아 용연이 되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용연을 보지 않고, 제주도에 다녀왔다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일 것이다.






    조천에서 남쪽으로 오르막길을 30분쯤 달리면 산굼부리가 나온다. 1989년10월 신혼여행 때 이십여 쌍의 신혼부부들이 가슴으로 풍선 터트리기를 하며 즐겁게 지냈던 곳.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머리에만 남아있는 조각뿐이었다. 32년이란 세월은 돌로 지은 건물도 이겨낼 수 없는 강도라고나 할까. 백록담과 비슷한 시기에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천연기념물 263호인 산굼부리.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이번에 새로 만난 것은 구상나무였다.




    산굼부리 모습 오른쪽 상단이 1.2km 길이의 구상나무 길이고, 사진 위쪽에 전망대와 꽃굼부리가 있다
    '

    잎이 성게가시처럼 생겨, 제주도 사람들이 쿠살낭(성게나무)이라고 부르던 것을

    구한말 때 영국 출신 식물학자 어니스트 윌슨(1876~1930)이 미국으로 가져가 특허

    등록을 하면서 구상나무라 이름 지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이용되며, 유럽에서는

    한국전나무(Korean Fir)로 불리는 한국 토종나무다.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1999년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유성룡 고택인 충효당(忠孝堂) 앞 정원에 기념으로 심었던 구상나무의 늠름함을 산굼부리에 만난 것은 참으로 큰 기쁨이었다.






    산굼부리 구상나무 

    성산일출봉(천연기념물 420호) 앞에 있는 식당에서 은갈치 구이와 조림에,

    한라봉막걸리를 곁들여서 맛있게 먹고 일출봉에 올랐다. 신혼여행 때는 입구

    에서만 올려봤고, 졸업여행 때는 분화구를 지나 동쪽 벼랑까지 갔었던 일출봉.

    바다 위에 떠있는 궁전처럼 웅장하고, 왕관보다 더 아름다움을 뽐내는 일출봉.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오르는 가슴은 숨차고 내려오는 무릎이 아프지만, 오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참맛을 모르는 일출봉. 5월의 파란 하늘과 푸른 목초(木草)가

    빚어내는 파란나라에 오른 모든 사람들을 파랗게 만드는 일출봉. 두 번째 오른

    일출봉의 감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일출봉에서 내려와 들른 곳은 ‘빛의 벙커’였다. 옛날에 한일 해저 광케이블 통신망을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져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됐던 축구장 반 크기의 지하벙커는, 이제 사람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하도록 꼬드기는 빛의 벙커로 거듭났다. 모네, 르누아르, 샤갈 등 거장들의 작품을 디지털 화면에 담아 영화처럼 흐르게 해서 환상속에 빠져드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사람의 창조적 상상력은 시간을 공간의 뜻으로 바꾸었고 같은 시공간을 전혀 다른 것으로 활용하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둘째 날의 마지막 방문지는 이중섭미술관이었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한국의

    전통적인 소와 천진난만한 어린이, 그리고 물고기와 게로 표현했던 천재화가

    이중섭이 피난와서 살던 초가집 단칸방 옆에 멋들어지게 세워진 이중섭미술관.

    하지만 코비드19가 문제였다. 사전 예약으로 하루에 30명만 입장할 수 있다는

    냉정한 목소리를 듣고, 그가 살던 집터를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는

    전에 와서 이중섭 작품을 본 적이 있으나, 화가인 옆지기의 실망은 매우 컸다.

    아쉬움은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5.16도로의 나무터널 길을 드라이브하는 것으로

    달랬다.





    이중섭 - 길 떠나는 가족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이중섭 생가 



    ◆장판물결 선물한 마라도, 해돋이는 다음에…



    셋째 날은 마라도에 가서 하룻밤 자면서 이튿날 해돋이를 보는 일정이었다. 마라도

    가는 배가 오후라서 오전엔 가파도와 마라도가 코앞으로 보이는 송악산 부근을

    돌아봤다. 송악산 해변에 일제가 파놓은 동굴이 증거하는 아픈 역사를 새김질

    하면서….



    송악산에서 모슬포 쪽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있는 알뜨로비행장을 처음 보고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700km

    떨어진 남경(南京)을 공습하는 전초기지로 삼기 위해 건설한 비행장이었다. 활주로

    는 없어져 감자와 보리 마늘 밭으로 이용되고, 비행기 보관소인 격납고가 십여 개

    흉물처럼 남아 있었다. ‘알뜨로’는 ‘마을 아래에 있는 너른 벌’이라는 제주도 말. 일제는 죄 없는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해 땅을 빼앗고 비행장 건설에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직도 알뜨르에는 일본군이 남겨 놓은 콘크리트 격납고가 남겨져 있다. 이곳에는 제로센 비행기라는 강문석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이 남겨져 있다.  

    마라도로 가는 마지막 배에 올랐다. 화창한 5월 날씨에 물결도 잔잔했다.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높은 파도 때문에 때도 없이 뱃길이 끊긴다는 말은 오늘만은 빈말

    이었다. 뱃사람들은 아주 잔잔한 물결을 장판파도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날이 바로 장판파도였다.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에 가려는 열망을 하늘과 바다와 땅이 모두 안덕분이었다.






    운진항에 설치된 마라도 지도 



    마라도는 별천지였다. 끝없는 바다와 기암괴석을 자랑하는 해변과 반갑게 인사하는 들꽃들과 대화하면서 느릿느릿 걸어도 섬을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 남짓 정도 걸리는 작은 섬. 작지만 철새들이 오고가며 쉬는 보금자리이며, 방풍나물과 뿔소라가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한다. 학생이 없어 초등학교가 3년 째 휴교 상태이지만, 톳 해물 짜장과 짬뽕으로 인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사는 무릉도원이다.



    하지만 좋은 것을 한꺼번에 다 누릴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새벽 3시에 일어나 은하수와 해돋이를 보러 나섰는데, 구름이 너무 짙었다. 별은 이따금 숨바꼭질 하듯 조금만 보여줬고, 해는 발간 노을만 보여줬다. 바람은 겨울옷을 껴입어도 추울 정도로 세차게 얼굴을 때렸다. 다시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한두 번 더 오는 정성을 보여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별과 해돋이만 다음을 위해 보여주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뱃길도 장판파도였다. 코비드19가 물러갔을 때 마스크 벗고 다시 찾을 것을 손가락 걸며, 3박4일 동안의 제2신혼여행을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글 : 홍찬선 



    그는 4350년 7월 1일부터, 28년 기자생활을 마치고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한국경제신문과 동아일보 머니투데이에서 한 기자생활을 바탕으로 

    동국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지천명에 공부하는 게

    쉽지 않지만 행복합니다. 자유인이 된 뒤 시인이 되어 제6시집까지, 

    소설집도 냈습니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모색해보는 "패치워크 인문학".

    "임시정부 100년시대 조국의 기생충은 누구인가"도 썼습니다. 




  • 글쓴날 : [21-07-24 18:40]
    • 변재진 기자[joypyu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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