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아 오키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설이 되다
  • 아트뉴스온라인 대표/편집인  변재진 


    1915년 미국 현대 사진의 선구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는 우편으로 배달된 무명화가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의 작품을 보고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이 무명 여성작가에게 세계적인 작가들이 전시를 하는 자신의 갤러리 291화랑에서 작품전시를 하도록 해주었습니다. 28세의 무명 여성작가의 전시를 하는 것은 모험이었지만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처음 시작된 인연으로 52세 유부남 사진작가 스티글리츠는 28살 조지아오키프와 23살의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집니다. 




    잘나가던 사진작가이자, 화상이었던 스티글리츠에 의해 발탁된 오키프는 급속도로 유명해지면서 실력보다는 예술계의 거물인 스티글리츠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이 많이 돌기도 했습니다.

    1918년부터 1937년까지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를 모델로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300여점의 사진작품 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누드 사진으로 인하여 전시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뉴욕커들의 관심은 그녀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아름다운 그녀의 몸이었습니다.  


    1921년 오키프의 누드를 포함한 스티글리츠의 사진전이 열렸고, 전시회를 보러 온 스티글리츠의 아내는 오키프의 누드사진에 충격을 받고, 이혼을 하게 됩니다. 스티글리츠는 이혼 후 23살의 나이 차에 불구하고, 오키프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스티글리츠와 오키프가 1915년 처음 만난 후 100년이 지난 2016년에 나이 차이를 초월하고 뜨거운 사랑을 하였던 두 사람의 특이한 전시회가 개최 되었습니다. 2016년 11월 7일부터 2017년 1월 13일까지  Grace Howl에서 개최 된 전시회의 주제는 스티글리츠의 사진작품도 아니고, 오키프의 그림도 아니었습니다.



    전시회의 전시작품은 이 두 사람이 서로 알기 시작한 1915년부터 스티글리츠가 사망하는 1945년까지 30년 동안 나누었던 두 사람의 뜨거운 애정이 그대로 남아있는 연애편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 기간 동안 대부분 떨어져 살았고, 서로에게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는데, 때로는 하루에 두 세 번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평생 교환한 연애편지는 대형 전시장의 벽을 가득 채웠습니다. 미국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인 조지아 오키프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즈 사이에 오고 간 연애편지는 열정적이고, 시적이고, 생생하고, 강렬합니다. 그리고 이 연애편지는 20세기 미국 예술과 문화의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조지아 오키프와 알프레드 스트글리츠의 연애편지에서 영감을 받은 그레이스 호올(Grace Howl)의 전시회 "투게더 & 어파트"는 전시장의 벽면 가득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편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관람자들은 연애편지 사이를 걸으면서 편지를 읽기도 하고, 두 연인의 생각과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특이한 전시였습니다.


    전시장에는 두사람이 연애편지를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 침실을  설치하였는데 알프레드 스티그리츠의 경우는 뉴욕 레이크 조지 오크타운의 집  침실과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고스트렌치의 그녀의 침실을 설치했습니다.  A 섹션은 스티글리츠가 보유한 "291"과 "아메리칸 스레이스"라는 두 개의 갤러리를 묘사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피카소, 로댕, 마티스, 오키프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첫 번째 장소입니다.


    오키프는 "미국 모더니즘의 어머니"라고 인정을 받고 있고, 스티글리츠는 사진작가이고, 출판업자이며, 갤러리스트로 미국에 현대 예술을 도입하는데 특별한 공헌을 하였으며, 사진이 예술의 형태로 인정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두  연인은 1915년에 시작하여 스티글리츠가 사망하는 1946년까지 30년동안 연애편지를 통하여 아름다운 애정을 나누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들은 열열히 사랑하였는데,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뮤즈였고,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안내자이고, 멘토였으며 그녀의 인기와 성공의 주요 공헌자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관계의 복잡성은 과장 되었고,  23살 연상의 유부남 작가를 사랑했고, 그의 작품 속 나체 모델이 되었던 그녀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미술계에서 섹츄얼리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오키프가 점차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미국 유럽을 여행하였고, 결국은 예술 속에 위안을 찾으며, 뉴멕시코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정착을 합니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 사이의 놀라운 연애편지의 기록을 통해서 그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열열한 숭배자가 되고, 연인으로 발전하고, 부부가 될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20세기 예술인들의 생생한 문화와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작품을 보지 않고도 이들의  연애편지를 통해서 현대 미국예술의 개척자 두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습니다.




    1946년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였던 스티글리츠가 죽자 조지아 오키프는뉴멕시코의 사막으로 떠나 은둔생활을 시작합니다.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은 그녀가 1917년 기차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그녀는 이 곳의 풍경에 단번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후 1929년부터 여름을 뉴멕시코에서 나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하여 1986년 산타페에서 숨질 때까지 '애비큐(Abiquiu)'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전념을 했습니다.

          조지아 오키프가 거주하던 뉴멕시코의 집 


    조지아 오키프는 이 곳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수집한 많은 물건들을 자기 작품에 즐겨 묘사하곤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뉴 멕시코의 독특한 바위들과 햇빛에 말끔히 육탈(肉脫)된 동물의 뼈·해골·뿔 등은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애비큐와 고스트 랜치 목장의 저택을 이런 ‘예술품’들로 장식했고,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습니다.





    이런 수집품들은 오키프의 정신세계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키프는 무엇이건 간에 버리는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집안은 항상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는데, 오키프는 이들을 각기 모양과 색깔 등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전화는 물론 전기와 수도 시설조차 없는 문명의 변경에 스스로를 유폐시켰습니다.  조지아 오키프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몸짓이나 페미니즘적인 행동을 두드러지게 한 적은 없습니다. 또한 그녀에 대한 평가 역시 스티글리츠와의 관계에 묻혀 뒷전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그림도 성적인 선입견들로 인해 왜곡이 되고는 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지아 오키프는

    화가로서보다는 여성으로 더 많은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말년의 오키프의 곁에는 젊은 남자인 후앙 해밀턴 (Juan Hamilton)이 있었습니다. 오키프는 자신이 85세에 만난 26세의 후앙 해밀턴에 대해 스스로 연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1986년 자신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다시 한 번 세간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비록 해밀턴이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자신이 평생에 걸쳐 작업한 모든 작품들과 재산을 자신의 조수이자 친구였던  후앙 해밀턴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입니다. 후일 해밀턴의 부인인 안나 마리는 그녀의 수집품과 책, 옷 등 유품을 미술관에 기증했습니다.



    28살에 52세 유부남을 사랑하고, 결혼 한 것도 대단한 용기이지만, 85세에 26세 남자를 연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영혼이 자유로운 오키프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간혹 그녀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가십처럼 이야기되고는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도 사인을 하느냐"고 반문을 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조지아 오키프는 꽃을 즐겨 그렸는데 많은 비평가들이  그녀의 작품과 여성 섹슈얼리티와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70년동안 그림을 그렸던 여류화가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화가가 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항상 칼날 위를 걷는 기분

    이었지요.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 다시 올라가서 걸을 것입니다. "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고, 원하는 곳에 갈 수 없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학교와 교사 화가들로
    부터 배운 것은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 결국 나는 타인은
    신경 안쓰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나의 그림을 그렸다.  ” 

                                            - 조지아 오키프 - 


      그녀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뒤에도 남편의 성(姓)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결혼 전 성을 그대로 사용했고,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90세가 넘어서 조지아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자신의 누드 사진작업을 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알프레드가 나를 찍기 시작한 것은 내가 스물 여섯살 정도였을 때부터 였다. 내 사진을 그의 사진전에서 처음으로 전시한 것은 앤더슨 갤러리에서 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전시된 사진을 돌아보고 나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그가 나를 찍은 것처럼 자신들의 아내나 여자 친구를 찍어 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알프래드는 하도 우스워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날 찍듯이 되려면, 알프레드와 자신들의 아내나 여자친구가 얼마나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의 아내나 여자친구의 누드를 찍어 달라고 부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 글쓴날 : [23-03-28 22:10]
    • 변재진 기자[joypyu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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